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미 전쟁 (문단 편집) === 요크 공작 리처드의 죽음 === 1459년 본격적인 무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칼레의 워릭 백작이 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카스티야 및 한자 동맹의 함대를 공격하자 왕은 워릭과 솔즈버리, 그리고 요크 공작을 조정으로 소환하였다. 하지만 요크파는 체포를 우려하여 이를 거절하고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마거릿 왕비는 이미 요크파에 대비하여 랭커스터파 군대를 소집하고 있었다. '''러드포드 다리 전투'''에서 요크파가 패배하면서 요크 공작과 네빌 가문 등은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조정은 랭커스터파가 장악했다. 하지만 1460년에 요크파가 장악한 칼레로부터 네빌 부자[* 요크 공작 리처드의 처남인 솔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그 아들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와 마치의 에드워드(훗날의 [[에드워드 4세]])가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여 수도 런던을 장악하고, '''노스햄튼 전투'''에서 랭커스터파에 승리하여 다시 헨리 6세를 생포한 후, 정권을 장악하고 아일랜드에 있었던 요크 공작 리처드를 불러왔다. 하지만 여기서 요크 공작은 악수를 두는데, 귀족들 앞에서 옥좌에 직접 손을 대고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귀족들은 아무리 헨리 6세가 결점이 있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재위 중인 왕을 물러나게 할 생각은 없었고,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마가렛 왕비는 북부 웨일스의 랭커스터파 병력을 소집하고, 스코틀랜드 왕국으로부터 지원군을 받는 등 요크파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요크 공작은 이를 요격하기 위해 북상했지만 1460년 12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대패했고,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의 둘째아들 에드먼드, 처남인 솔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까지 전사했다.[* 요크파가 너무나 허무하게 패배한 나머지 무지개 색깔을 외우는 방법 중 하나인 'Richard of York gave battle in vein'(요크의 리처드가 전투를 헛되게 내주었다)이 이 전투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마가렛 왕비는 숙적인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잘린 목을 요크 성문 위에 내걸고, '요크 공작은 요크 성이나 다스려야 한다'며 조롱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